야트막한 산 언덕 위로 아침 햇살이 살포시 얼굴을 드러냅니다. 물결 하나 일지 않는 저수지의 수면위론 물안개가 슬금슬금 피어 오릅니다. 겨울 찬 바람을 견딘 활엽수들은 연초록 새싹으로 배경을 치장하였습니다. 은은하면서도 화사한 연분홍 산벚꽃은 수면 위에 그대로 반사됩니다. 그 자체로 한 폭의 수채화입니다. 이 때를 놓칠세라 제방에 줄지어 선 카메라에선 셔터 터지는 소리가 끊이질 않습니다.

여기는 화순 세량지입니다. 논·밭농사 짓는데 필요한 물을 공급하는 저수지입니다. 제방 길이 50m 남짓, 높이 10m의 작은 저수지입니다.

이 곳은 지금 농업용수를 공급하는 본래의 역할보다는 ‘사진작가’들의 출사지(出寫地)로 더 사랑받고 있습니다. 봄이면 연분홍빛으로 피어나는 산벚꽃과 초록의 나무들이 수면 위에 그대로 투영되는데, 햇살이 비칠 무렵 피어오르는 물안개와 어우러져 이국적 풍광을 빚어냅니다. 또 가을이면 단풍으로 물든 산과 어울려 아름다움을 자랑합니다. 때문에 사진 찍기를 즐기는 사람들에게는 빼 놓을 수 없는 출사 명소입니다. 사진 애호가들은 이렇게 멋진 풍광 한 컷을 잡기 위해 새벽부터 찾아가는 수고를 아끼지 않습니다.

세량지는 지난 2012년 미국의 유명한 뉴스 채널 CNN이 ‘한국에서 가봐야 할 곳 50곳’에 선정하면서 유명세를 떨치고 있습니다. 산벚꽃이 만발하는 봄철에 가장 많은 사진작가들이 몰려들지만, 요즘은 사시사철 탐방객들의 발길이 그치지 않고 있습니다. 화순군은 이 곳을 화순 8경의 하나로 꼽고 자랑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인파가 몰려들자 자치단체에서는 이 곳을 공원으로 만들었습니다. 정자를 만들고 호수도 정리하고 조팝나무, 단풍나무도 심었습니다. 저수지를 빙둘러 둘레길을 만들어 탐방객들이 여유롭게 산길을 걸을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여름엔 해바라기를 대대적으로 심어 또다른 볼거리 명소로 가꾸고 있습니다. 150만명이 살고 있는 광주와 맞닿은 곳에 있기에 이제는 인기 산책코스로 각광받고 있습니다.

제방에서 한 폭의 수채화를 감동으로 감상한 탐방객들은 이제 숲길로 들어갑니다. 작은 오솔길이지만 바로 깊은 숲속에 들어선 느낌입니다. 산벚꽃나무와 오리나무, 참나무 등 활엽수에다 삼나무 등 키 큰 나무들로 가득 찬 숲에 산딸기나무, 맹감나무 등 넝쿨식물들도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저수지 안에는 버드나무가 줄기를 담그고 자라면서 또다른 멋진 풍광을 연출하고 있습니다. 길 가에 쓰러진 나무둥지 위에는 어느 탐방객이 정성스레 쌓아 올린 아주 작은 돌탑이 눈길을 붙잡습니다.
해찰 부리며 느릿느릿 걸어도 30분이면 넉넉한 둘레길이지만 눈 호강과 함께 들어마시는 맑은 산소의 양은 높은 산을 등산한 것에 결코 뒤지지 않습니다.

오늘도, 세량지에는 수많은 탐방객들의 발길이 그치지 않고 있습니다.
그래도 올 봄엔 맘 먹고 하루쯤 새벽녘에 부지런 한 번 떨어 보는 게 어떨까요. 물 속에 비친 신록 숲과 산벚꽃들, 그리고 솜털처럼 피어오르는 물안개가 무릉도원같은 선경(仙景)을 연출할 것입니다. 그 속에서 봄의 숨소리가 생생하게 들려올 겁니다. (2020년 3월)

이경수는 늘 꿈을 향해 어딘가로 떠날 준비가 된 자유인. 골짝나라 곡성의 산골마을에서 태어났다. 대학에서 신문방송학을 공부하고 기자가 됐다. 30년 넘게 광주에서 언론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무작정 떠난 한달간의 인도여행’ ‘사랑해서 떠난다’ ‘新만주아리랑’ 등 몇 권의 여행기를 썼다. 관광학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땄으며, 이제는 보다 더 잘 놀기 위해 궁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