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라는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허리는 잘록하고 오똑한 코를 가진 새침한 비비안 리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또한 그녀를 사랑했던 클라크 게이블의 콧수염과 그윽한 눈빛을 잊지 못할 것이다. 자존심이 강하면서 사랑 앞에선 모든 걸 바치는 스칼렛을 향한 자유분방하면서도 유머가 있고 다소 오만한 레트의 사랑은 과격하지만, 그는 스칼렛을 죽을만큼 사랑했다. 그러나 스칼렛이 사랑하는 사람은 애슐리이고, 그 사실을 알고 상심한 레트는 군대에 지원하게 되고, 가지 말라는 스칼렛에게 사랑을 고백하면서 하는 석양 무렵의 키스는 이 영화의 백미다.

“오! 스칼렛! 세상 어느 여자보다 당신을 사랑했소! 어느 여자보다도 당신을 더 많이 기다렸소! 전쟁터로 떠나기 전에 당신의 품과 키스를 맛보고 싶소! 오! 스칼렛! 내게 키스 해 주시오! 한 번만이라도!

누군가에게 이토록 절절하게 사랑을 받는다면 그 누구라도 행복할 것이다. 뜨겁게 타오르는 석양 무렵이면 키스를 하고 싶다. 정연우의 ‘키스’는 석양 무렵과 참 많이 닮아있다. 충분히 관능적이면서도 형식을 벗어나지 않은 단단함이 있는 키스. 눈을 감고 키스를 그려본다. 소란하지 않으며, 잘 익은 홍옥을 베어문 듯 달디 단 간절함이 거기에 있고, 지나치지 않으나 입 속에 솔향이 떨리고 그 떨림이 솔숲을 달리는 키스.

키스 / 정연우

고독한
혀끝에서
저항없이 살살거리고
뜨거워서 파닥거리는
미칠듯한
내밀함

영화 속으로 좀 더 들어가 보자. 레트는 젊은 시절을 다 보내고 난 후에야 다시 찾아와서 가까스로 그녀와 결혼을 하게 되지만 그 사랑은 오래가지 못한다. 첫사랑인 애슐리에 대한 그녀의 집착과 그의 딸 보니가 말에서 떨어져 죽게 되면서 결국 레트는 그녀를 떠나게 된다. 레트가 진정으로 사랑했던 여자는 스칼렛이지만, 스칼렛은 레트가 떠난 후에야 그 걸 알아차린다. 소설 속의 이야기를 인용한 ‘레트의 청혼’에서 정연우는 그가 얼마나 스칼렛을 사랑했는지를 보여준다.

레트의 청혼 / 정연우

난 당신을 잊을 수가 없소!
당신을 처음 만났을 때부터 내겐 당신뿐이었소!
“난 당신을 사랑하지 않아요.”
그렇다면 재미로라도 결혼하는 것 어떻겠소!
“재미라구요!”
내 속에 시커먼 악당이 들어있다 해도 당신을 사랑하오!

커텐을 찢어서 만든 드레스가 너무나 예뻤소!
질투에 눈이 멀어 당신 앞에서 돌아섰지만
그날, 그렇게 돌려보내는 것이 아니었소!
손가락을 깨물면서 후회했소!
그 날 당신이 원했던, 그 때 하지 않았던 키스를 바치오!

이젠, 당신이 남편을 더 이상 바꾸는 것을 기다릴 수가 없소!
“바보로군요, 내가 누구를 사랑하는지 알면서”
그렇다면 한 번은 청년이었고, 한 번은 노인이었던
여자를 잘 아는, 알맞은 나이의 나는 어떻소!
진심을 다해 청혼하는 것이오!
내가 말하오! 당신이 늙어도 당신 옆에는 나뿐이라는 것을!

그렇게 말했음에도 스칼렛을 떠나는 레트와 이제는 그를 잡고 싶은 스칼렛. “그를 이렇게 떠나보낼 수는 없어! 그가 다시 돌아 올 방법을 생각해야 해. 그래 내 고향으로 가자. 내 고향으로 가면 반드시 방법이 있을 거야! 일하고, 싸우고, 죽을 가치가 있는 것은 오직 땅 뿐이라고 했던 아버지 말씀처럼 고향으로 가자.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떠 오를테니까!”그렇게 스칼렛은 그의 땅에서 사랑하는 레트를 기다리면서 영화는 끝난다. 그의 땅에서 혼자 치열하게 살 준비를 마친 스칼렛이 외로워 보이지 않았던 것은 레트를 기다리는 마음이 거기에 있었기 때문이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영화는 마거릿 미첼의 동명소설(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Gone with the Wind)을 빅터 플레밍 감독이 연출한 1939년도 영화이다. 원작자인 마거릿 미첼은 무명의 작가였는데 이 한 편의 소설로 퓰리처상을 받는다. 그녀는 1900년도에 미국 남부 조지아주 애틀랜타에서 태어났다. 여성의 참정권을 주장하는 진보적인 어머니와 남북전쟁을 겪었던 할머니로부터 영향을 받고 자랐는데, 억척스러운 할머니와 자기주장이 강한 어머니의 모습에서 소설 속의 스칼렛을 그려냈고, 첫 번째 남편에게서 레트라는 캐릭터의 영감을 얻었다고 한다.

사랑이라는 것이 꼭 오후 3시 같다. 팔팔하고 아름다운 젊은 날이 다 가버리고 나서야 그 마음이 무엇이었는지 알아차리는 어리석음이, 그나마 오후 3시쯤 이기라도 한다면 다행이지 싶다. 무엇을 하기에는 너무 늦거나, 너무 이른 오후 3시. 저마다의 아름다움도, 비켜설 곳 없는 고독도 더 많이 아파야 지난다는 것을 오후 3시가 되어야 알게 되니 말이다. 그 순간에는 몰랐던 것들이 어느 순간 보인다면 그 시간이 아마도 오후 3시쯤은 아닐런지. 다행히도 석양빛이 등 너머에서 길을 비춰주니 그만큼만이라도 고맙다고 해야 한다. 아직은 남아있는 내 시간들이 고맙다고 해야 한다. 그래서 축배를 들듯이 키스를 해야 한다.

만해 한용운의 ‘첫 키스’라는 시는 언어의 유희로만 본다면 첫정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떨림 그 자체의 시이다. 육체적인 사랑을 그렸다기보다는 정신적인 사랑을 그렸다고 흔히들 말하지만 시라는 것이 읽는 사람 마음에 울림을 가져다준다면 그대로 따라 가면 되지 않을까. 가장 순수할 때 하는, 다 늦은 나이에 하는 키스가 아닌 ‘첫 키스’를 있는 그대로 읽어본다.

첫 키스 / 한용운

마셔요, 제발 마셔요.
보면서 못 보는 체 마셔요.
마셔요, 제발 마셔요.
입술을 다물고 눈으로 말하지 마셔요.
마셔요, 제발 마셔요.
뜨거운 사랑에 웃으면서 차디찬 잔 부끄럼에 울지 마셔요.
마셔요, 제발 마셔요.
세계의 꽃을 혼자 따면서 항분(亢奮)에 넘쳐서 떨지 마셔요.
마셔요, 제발 마셔요.
미소는 나의 운명의 가슴에서 춤을 춥니다.
새삼스럽게 스스러워 마셔요.

오후 3시. 아름다운 기억을 향해 한 발 내딛는다. 당신, 기다려요. 오늘은 항분(亢奮)에 떨더라도 두려워 말아요. 오후 3시가 되면 키스를 해야 해요.




*항분(亢奮): 어떤 자극을 받아 북받쳐 일어나는 감정, 또는 그 흥분(興奮)
*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원작의 내용을 재각색하여 인용하였습니다.
*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표지 사진을 재각색하여 사용하였습니다.

정연우는 시인이다. 쌩텍쥐베리의 ‘어린왕자’를 좋아하는 시인이다. 함평에서 태어났으며 석양 무렵 기차가 지나가는 시간이면 그리움이 기차를 따라 달려왔다고, 그래서 기차를 타고 어린왕자가 왔던 소행성 B612을 가보는 것이 꿈이라고 말한다. ‘곡성어르신들의 이야기’ 집필작가로 활동하고 있으며, 대안교육에도 참여하고 있다. 관광학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땄으며, 곡성에서 전원생활을 하는 시인은 충실한 정원사처럼 아름다운 시(詩)의 정원사가 되고 싶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