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봉유설’에서는 한 고을의 정치는 술에서 보고, 한집안의 일은 양념 맛에서 본다고 하였으니, 그만큼 술과 음식이 그 나라의 정치에서부터 집안의 대소사까지를 측정하는 척도가 된다 할 수 있다.

‘부녀필지’에서 음식과 술의 관계에 대해서 쓰기를 밥 먹기는 봄같이 하고, 국 먹기는 여름같이 하고, 장 먹기는 가을같이 하고, 술 먹기는 겨울같이 하라 했다. 이는 대체로 음식의 사시(四時)와 그 특색을 말하는 것으로 밥은 따뜻한 것이 좋고, 국은 뜨거운 것이 좋으며, 장은 서늘한 것이 좋고, 술은 찬 것이 좋다는 것을 의미한다.

차가워야 맛있다는 술. 허나, 술을 아무리 차게 해서 마셔도 뱃속으로 들어간 술은 뜨거워지기 마련이다. 뜨거워진 술은 사람들을 흥분하게 하고, 결국 쓸데없는 술주정을 하기도 하고, 숨겨왔던 마음을 들키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더러는 술기운을 빌어 옆사람에게 수작을 걸기도 한다. 정연우 시인은‘수작(酬酌)을 걸어오거든’이라는 시에서 수작을 논했다. ‘복숭아빛 마음이 술잔에 비친다면 술독에 빠져서 주도가 뻘겋더라도 네 잔에는 그 마음을 곱하여 따를 것이다’라고 했다. 이 얼마나 술 맛나게 하는 수작인가.


수작(酬酌)을 걸어오거든 / 정연우


수작(酬酌)을 걸어오거든
계영배(戒盈杯)만큼만 마신다 하여라

허나, 그 앙증맞은 의도가 고스란히 드러나는
복숭아빛 마음이 술잔에 비친다면
술독에 빠져서 주도(酒道)가 뻘겋더라도
그 어떤 이유에서라도 취(醉)하지 않을 것이나,
네 잔에는 그 마음을 곱하여 따를 것이다

이런 수작이라면 나는 얼마든지 술을 따르겠다
아무데서나 펼쳐 보일 수 없는 이야기가
그 수작 앞에서 진심이 된다면 나는 술을 마시겠다
어쩌면, 봄날이 더 뜨거웠던 적이 있었던게지!
부딪치는 술잔에 부귀영화가 다 무슨 소용이더냐!
그냥 그대로 그 어떤 이유라도 뜨거우면 되었지!
그것이 술이지!

흐드러지게 핀 봄날을 어쩌지 못해 마시는 술도
네 앞에서라면 다시 뜨거울 것 같지 않느냐!

하여, 계영배(戒盈杯)라 할지라도
넘침을 경계하여 마신다면
술이 수작질로 이어질 것도 없고,
마음에 꽃물 들 듯이
차분히 내 주량을 알아서 적당히만 마신다면
한번쯤은 수작 앞에서 해찰을 해도 좋지 않겠는가!


물론, 수작이라는 것이 남자가 여자에게 거는 것일 수도 있겠으나, 평소에 마음이 불편했던 사람에게 술기운이라는 명목하에 말을 걸어서 행동으로 수작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 수작이라는 말이 실은 술 따를‘수(酬)’, 술 따를‘작(酌)’이 합쳐진 말로, 이는 단순히 술잔을 주고받거나 응대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술이라는 것이 같이 마심으로써 서로에게 뭔가를 원하기도 하고, 바라는 것이 있을 때 같이 마시기도 하는 것을 본다면 꼭 수작이 아니더라도 필요에 의한 어떤 의도가 숨어있기는 하겠다.

정연우는‘술병 앞에서 시인이 되다’라는 시에서 그의 진심이 들킨다. 아니, 그 앙증맞은 의도를 고스란히 드러난다. 꽃 피는 봄날만 되면 술이 고프다면서 흐드러지게 핀 꽃을 보고도 꽃은 안 보인다고 했다. 시인에게 술은 흐드러지게 핀 봄날을 어쩌지 못해서 마시는 것도 술이고, 뭣 같은 친구라도 그 죽일 놈이 미친놈이라서 좋아서 마시는 것도 술일게다. ‘술만 더 고픈 미친 짓을 갈촤준 죽일 놈!’이라니.

술병 앞에서 시인이 되다 / 정연우

꽃 피는 봄날만 되면
나는 왜 술이 고플꼬?

흐드러진 꽃은 나를 보고 환장하는디
나는 왜 꽃은 안 보일꼬?

넘들은 꽃향기에 취한다더만
나는 왜 술에 취하는고?

친구따라 강남간다고
비오는 날, 비 몇사발 마시믄
정신차린다고

어라, 비온다
정신차리러 가보자

아, 좆갔네!
술만 더 고픈 미친 짓을
갈촤준

죽일 놈!



인생의 쓴 맛을 시로 쓴 정호승은‘술 한잔’에서 인생은 나에게 술 한잔 사주지 않았다 / 겨울밤 막다른 골목 끝 포장마차에서 빈 호주머니를 털털 털어 나는 몇번이나 인생에게 술을 사주었으나 / 인생은 나를 위해 단 한번도 술 한잔 사주지 않았다. 고 하면서 막다른 골목에 혼자인 무심한 인생을 원망한다. 그러면서도 술 한잔이 주는 위로가 핑계가 되어 술을 거부하지 못하는 모습이 보인다. 손을 내밀어도 늘 외로웠을 인생이 거기에 있다.

그러나 류시화의 시‘잔 없이 건네지는 술’은 세상의 어떤 술에도 나는 더 이상 취하지 않는다 / 당신이 부어 준 그 술에 나는 이미 취해 있기에. 아! 류시화는 술로 사랑을 시로 썼다. 그 사랑 앞에서 취할 자 누구던가.

해동가요에 술 익으면 벗이 없고 / 벗이 오면 술이 없더니 / 오늘은 무슨 일로 / 술이 익자 벗이 왔네 / 두어라 이난병이니 / 종일 취를 하리라. 했다. 여기는 따뜻한 남도다. 술 익느라 정신이 혼미하다. 골목의 개들도 코를 벌름거리며 다닌다. 더욱이 지금은 봄날이다. 술 익어 가는 봄날, 나는 종일토록 취할 준비가 되었다. 술 닳기 전에 오시는 센스 있는 당신을 오늘은 기다려 볼란다.




*수작(酬酌); 술 잔을 서로 주고 받거나 응대한다는 의미.
*계영배(戒盈杯); 술을 많이 마시는 것을 경계(警戒)하기 위하여 특별(特別)히 만든 잔.
*지봉유설, 부녀필지의 내용 중 일부를 필자가 각색하여 인용하였다.

정연우는 시인이다. 쌩텍쥐베리의 ‘어린왕자’를 좋아하는 시인이다. 함평에서 태어났으며 석양 무렵 기차가 지나가는 시간이면 그리움이 기차를 따라 달려왔다고, 그래서 기차를 타고 어린왕자가 왔던 소행성 B612을 가보는 것이 꿈이라고 말한다. ‘곡성어르신들의 이야기’ 집필작가로 활동하고 있으며, 대안교육에도 참여하고 있다. 관광학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땄으며, 곡성에서 전원생활을 하는 시인은 충실한 정원사처럼 아름다운 시(詩)의 정원사가 되고 싶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