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꽃으로 터지고, 나 미소로 화답하니 그래 지금이 봄이구나! 보고만 있어도 설레이고 떨린다. 시골 오일장에만 있다는 뻥튀기 기계가 만수강산에 하나씩 있기라도 한 것처럼 날마다 팡팡 터지는 소리에 내 심장도 덩달아 터진다. 니 탓이다. 날마다 실실 웃는 내가 여기에도 있고, 저기에도 있는 것은 온전히 니 탓이다. 헌데 말이다. 그것이, 어디 니 탓! 뿐이겠느냐? 설레이고 떨리면서도 터지지 않고 살아있는 내 심장 탓이지! 이런 날이면 식탁에 노오란 생강나무꽃 꺽어두고 당신을 부르고 싶다.




생강나무
정우영(1960~)
 
마흔여섯 해 걸어 다닌 나보다
한곳에 서 있는 저 여린 생강나무가
훨씬 더 많은 지구의 기억을
시간의 그늘 곳곳에 켜켜이 새겨둔다.
 
홀연 어느 날 내 길 끊기듯
땅 위를 걸어 다니는 것들 모든 자취 사라져도
생강나무는 노란 털눈을 뜨고
여전히 느린 시간 걷고 있을 것이다.
 
지구의 여행자는 내가 아니라,
생강나무임을 아프게 깨닫는 순간에
내 그림자도 키 늘여 슬그머니
생강나무 시간 속으로 접어든다.



나는 봄이 오면 심장이 터질 듯한데, 어느 날, 정우영시인은 긴 겨울의 터널을 건너다가 여린 가지로 한자리에서 서서 세월을 산 생강나무를 보면서 그 앞에서 숙연해진다. 봄보다 먼저 오는 이 생강나무가 긴 겨울을 맨 몸으로 이겨내고, 잎이 나오기도 전에 꽃을 먼저 피워내는 모습에서 매번 그 시간들을 견디며 살아왔을 것을 생각하며 또한 대견해 한다. 그는 시간 속에서 여전히 걷고 있었을 생강나무를 천천히 들여다보는데“지구의 여행자는 내가 아니라, 생강나무임을 아프게 깨닫는 순간”이 대목에서 생강나무의 삶을 그가 자신의 삶으로 이입하여 겸허하게 받아들였음이 보인다. 인생에도 계절이 있듯이 생강나무라는 시를 쓸 때 그의 나이가 마흔 여섯살이었나 보다. 흔들리지 않고 미혹하지 않는다(四十而不惑)는 불혹(不惑)의 나이다. 그래서 정우영시인의 “생강나무”는 꽃으로써 아름다움이나 향기보다는‘그 자리에서 사라지지 않고 견디어 낸 의연(毅然)함’이 더 크게 다가온다.

생강나무는 보통 산수유와 혼동하기도 하는데 나무껍질 또는 꽃에서 생강 냄새가 난다 해서 그 이름이 생강나무이다. “김유정의 동백꽃”이라는 소설 속에서도 생강나무꽃이 등장한다. 그런데 소설에서는 생강나무꽃을 왜 동백(冬柏)꽃이라고 했을까? 그것은 강원도에서 태어난 김유정 때문이다. 여인들이 머리에 동백기름을 바르는데 강원도에서는 동백꽃이 피지 않고 생강나무꽃이 핀다. 이 꽃에서 기름을 취하면서 자연스레 생강나무꽃을 동백이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소설 속으로 잠깐 들어가보자.

주인집 딸인 점순이가 '느 집엔 이거 없지?' 하면서 삶은 감자 세 알을 내밀었을 때 난 밀어버렸다. 감자가 뭐가 맛있다고., 그 때부터였다. 내가 기르던 닭들을 괴롭히고 피터지게 닭싸움 시키고, 심지어 날 바보라고 놀리고... 화가 난 나는 닭을 때려죽이고 말았다. 순간 덜컥 겁이 났다. 주인집 닭을 때려 죽였으니 이제 점순이네 집에서 쫓겨나는 것은 아닐까? 겁을 먹은 나를 보며 점순이가 내 어깨를 토닥이며 말했다.

'닭 죽은 건 염려마! 내 안 이를테니!!'

그 때, 뭣 때문이었는지 내 어깨를 짚은 채로 점순이가 쓰러지고 내 몸뚱이도 그 위로 포개지듯 겹쳐졌는데, 한창 피어서 퍼드러진 노란 동백꽃속으로 폭 파묻혔다. 난 고만 알싸하고 향긋한 그 냄새에 땅이 꺼지는 듯 정신이 혼미해졌다.

처음 소설을 읽을 때, 그 때는 몰랐다. 노란 동백꽃이 생강나무꽃이었다는 것을. 아니, 그 향긋한 냄새가 점순이 살냄새라는 것을. 찐 감자 세 알의 의미도 그 땐 몰랐다. 생강나무의 꽃말이‘수줍음’이다. 김유정은 소설에서 노오란 동백꽃(생강나무꽃)을 내세워 해학과 유머로 순박한 시골 남녀의 사랑을 끄집어내었다. 봄이 오는 설레임을 이른 봄에 피는 노오란 동백꽃으로 두 남녀의 마음을 쿵쾅거리게 했다. 아! 그렇게 수줍은 봄이 만개했다.

곳곳이 다 꽃향기다. 혼자 보기에는 아까워서 당신 생각에 천천히 아껴 볼란다. 아니다. 꽃향기는 심장에 담아서 가져 갈란다. 다음엔 같이 가요. 당신.


*“김유정의 동백꽃”의 내용의 일부는 필자가 각색하여 인용하였습니다.

정연우는 시인이다. 쌩텍쥐베리의 ‘어린왕자’를 좋아하는 시인이다. 함평에서 태어났으며 석양 무렵 기차가 지나가는 시간이면 그리움이 기차를 따라 달려왔다고, 그래서 기차를 타고 어린왕자가 왔던 소행성 B612을 가보는 것이 꿈이라고 말한다. ‘곡성어르신들의 이야기’ 집필작가로 활동하고 있으며, 대안교육에도 참여하고 있다. 관광학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땄으며, 곡성에서 전원생활을 하는 시인은 충실한 정원사처럼 아름다운 시(詩)의 정원사가 되고 싶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