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유타야의 불상, 32X24cm, 수묵담채

결혼 전이니 벌써 40년이나 지난 추억이다. 1977년부터 6년간 펜팔로 인연이 되어 수많은 편지를 주고받으면서도 손가락 셀 정도 만났으니 참으로 무심한 인연이었다. 병영생활에서 휴가를 얻은 어느 날, 서로 만나기를 약속한 시간이었다. 현재 익산으로 지명이 변경 된 이리 버스터미널에 도착하기 3분 전이었다. 나는 차창 넘어 그녀가 떠나가는 뒷모습을 보고 있었다. 약속시간을 어긴 회초리이자 인연의 끝이었다. 열정과 냉정의 사이에서 나의 잘못을 인정하며 허탈하게 귀대했다. 그 후 그녀로부터 연필로 쓴 편지가 도착했다. 그때 그녀도 내가 차안에 있는 것을 봤지만 약속을 어겼기 때문에 그냥 홀연히 귀가했었다고... “당신은 연애 상대로는 좋으나 결혼상대자로는 안 된다.”라고 말하며 단서를 붙인다. “보이지 않는 신을 왜 믿는가? 평생 예술가로 살아 갈 것이라고 했는데 가난해서 싫다”고 했다. 그녀는 현실적 안목을 지닌 여성이었다.

나는 서로 다른 가치관의 차이를 이해하면서도 충격적이었다. 그래서 수도자나 독신생활을 염두 해 두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그래도 열심히 삶을 경작하고 시간 요리를 잘해서 노후에 누가 더 잘 살았는가? 축적된 삶의 질을 비교 해보자고 홀로 마음먹었다. 나름대로 최선을 다한 시간과의 싸움이었다. 그러나 지금도 시간 개념이 없는 나를 자주 발견하면서도 고칠 생각을 하지 못 한다.

미얀마에서 태국 국경도시, 맷�K에 입성했는데 이 도시는 상술이 뛰어난 중국인들이 많은 지역으로 경기가 활발한 느낌이다. 재래시장의 생기 넘치는 서민들의 일상은 어느 나라나 푸근하고 인정미가 철철 넘친다.

국경도시, 12X32cm, 수묵담채

하룻밤을 묵고 다음날, 아유타야로 이동하기 위해 버스터미널에서 표를 사서 대형 버스에 미리 배낭을 실고 잠시 무슬림 식당에서 아침식사를 하는데 배낭을 실은 그 버스가 시야에서 보이지 않는다. 아차! 시계의 분침을 태국 시간으로 교정하지 않았음을 그 때 알아차린다. 착시가 아니라 착오와 무지로 여유 있게 믿었던 시간이 순간 지나가버린 것이다.

식사를 중단하고 당황스러워 매표소에 가서 여직원에게 실수를 설명하니, 냉정한 시선으로 차표를 다시 사야 한단다. 그래도 애원하듯 떠나버린 버스에 연락을 부탁하고 사정해서 다음 시간에 배차된 버스에 올랐다. 좌불안석인데 도심 외곽의 간이정류장에 버스가 잠시 정차한다.

나는 무심하게 창밖을 내려다보며 한숨을 쉬고 있었다. 그런데 무심코 차창 아래를 보니 우리의 배낭이 보이지 않는가! 순간의 감정이 파도처럼 출렁이듯 “아! 우리 배낭이 여기에 있소”라고 동행인 김박사께 탄성을 지른다. 급하게 하차해서 배낭을 옮겨 실고 다시 자리에 앉아 철없는 어린아이처럼 고민을 씻어버린다. 배낭 안에는 미얀마에서 한 달 가까이 그린 250여 점의 그림들이 쌓여져 있고, 사진작가이신 김박사의 배낭에는 값비싼 중형 카메라가 있었으니, 잃어버린 자식을 찾은 어머니의 마음 같았다. 이 후 홀가분한 남행으로 다시 볼 수 없는 매표소 여직원의 순발력을 마음으로 감사할 뿐이었다. 업무상 냉정하게 대꾸하고도 신속한 처리를 취한 뒤 티켓도 연장해서 배려해 준 것으로 이방인의 실수를 십분 이해한 결과이다.

시간을 지키지 못해 인연이 단절된 기억과 시간을 착각해서 잃어버린 배낭을 다시 찾은 추억담은 시간을 통한 인관관계로 약속과 신뢰가 중요함을 내포하고 있다.

착각으로 발생된 절묘한 긴장과 안도감은 시간 위에 큰 파도타기를 즐기는 모험가의 균형 잡기와 같다는 느낌이다.

수로, 12X32cm, 수묵담채

석주(石洲) 박종석(朴鍾錫)은 한국화가로 호남대학교 및 조선대대학원 순수미술학과를 졸업하고 개인전 18회 및 초대전 7회를 통해 활동하며 광주미술상 수상과 서암전통문화대상을 수상 하였다. 또한 30여 년간 세계여행을 통해 세계 문화유산 연구와 현장 사생을 하며, 호남회화500년사를 연구하며 전업작가로 활동하고 있다.